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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준비....

1971년 늦은 가을, 월남에서 한국군이 철수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또, 철수는 한국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캄보디아 국경으로 이동할 지도 모르는데 그곳은 월남보다도 더 위험한 곳이라고도 했다. 좀 더 지나자 곧 귀국이 금지될 거고 따라서 신병도 오지 않을 거라는 소리도 들렸다.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고 소문만 무성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서 큰 작전도 없었던 것 같다~?
월남참전기장
그러다가 철수 소문이 사실로 확정 발표되었다. 캄보디아국경은 아니었다. 철수는 전 주월한국군 중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위치한 부대인 우리 2대대가 제일 먼저 한다고 했다. 월남에 온지 일 년이 넘어도 귀국이 금지되었고 월남 신병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드디어 철수일자가 12월 4일로 잡혔다. 내가 작년에 부산항을 출발한 날이 작년 10월 26일이니까 철수만 아니라면 10월 21일에 귀국선을 타서 10월26일 부산항에 도착하는 건데 약 한달 반이 늦어지는 것이었다.

철수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모든 군수물자에 대한 재물조사가 진행되었다. 모든 군수물자는 미군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미군에 제출되어있는 서류와 맞아야만 했다. 많아도, 모자라도 안 되었다. 전투에 필요한 무기, 탄약을 제외한 모든 군수물자를 정해진 규격의 나무상자에 넣어 일일히 미군의 확인을 거친 후에 바로 봉인했다. 그때 참으로 아까운 군수품을 많이도 버려야만 했다. 또, 중대방석 옆 마을의 한 동굴에는 오랫동안 모아 놓은 군수품이 가득 있는데 가져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도 들렸다..

귀국하는 장병한테는 나무로 짠 궤짝(귀국박스라 불렀는데 크기에 따라 A, B, C 형이 있었다.)을 계급별로 정해진 크기와 개수만큼 한국으로 가져갈 수 있는 특혜가 있었다. 병들은 물론 제일 작은 것 한 개였다. 지금까지 선임들의 귀국 때는 월남후임들이 조금씩 걷어 바치고(우리 통신반은 1인당 5불씩), 중대에서 C-레이션을 몇 박스씩 주어 보내니 조그만 귀국 박스를 대충 채울 수 있었다. 우리는 월남고참들이 귀국할 때마다 귀국선물을 바쳐 왔지만, 막상 우리가 개별 귀국이 아닌 전원 철수를 하게 되니 우리에게는 선물을 해줄 월남쫄병이 없었다. 겨우 중대에서 C-레이션 한 박스씩이 전부였다. 그래서 우리는 지역별로 묶어 필요한 만큼 귀국박스를 사용하기로 했다.
내가 넣을 것이라고는 여단 PX에서 구입한 헤드폰 한 개(홍수때 피난왔던 대대 하사한테 빌려주었다가 날린 앰프를 살 때 같이 산 것)와 파카 만년필 한 개, 그 유명한 Zippo라이터 한 개 그리고 중대에서 준 C-레이션 한 박스가 전부였다.... ㅠ.ㅠ

지금까지 해 오던 절반 병력의 출동이 아닌 중대 전 병력의 헬기 탑승계획이 세워졌다. 철수 시 적의 기습에도 대비해야 했다.
철수 전야~~, 모두들 들떠 있었다. 각자 개인관물을 챙겨 곤봉에 담았다. 태진이 생각이 많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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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 귀국....

드디어 12월 4일 날이 밝았다. 우려했던 밤도 별 탈 없이 지나갔다. 이제 조금 있으면 월남군이 방석을 인수하러 올 것이고 우리를 데려갈 헬기들도 올 것이었다. 아침 식사 후 중대 외각경계만 남기고 모든 병력이 헬기장에 집결 했다.
일 년 전 월남 신병 때 작전지역으로 출동하기 위해 헬기를 기다리던 생각이 났다. 그때는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던가.... 작전에 나설 때 마다 매번 이번에는 별일 없을까, 무사히 돌아 올 수 있을까 했었는데... 이번에는 돌아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방석을 인수할 월남군 병력은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몇 달 전에 우리를 도와 작전 때 동행하다 부비트랩에 한쪽 발을 잃은 월남인 "안"이 목발을 짚고 나타났다. 아마 6중대의 철수를 맞아 안 만큼 감회가 깊은 사람 흔치 않을 것이었다.... 중대장과 작전하사에 이어 나도 안과 작별의 악수를 했다.
CH-47 헬기 최근(2000년 12월)에 월남에 그것도 청룡 6중대가 있던 짜큐마을에 다녀 온 신재화 수병(223기, 나보다 먼저 6중대에 근무했었음.)의 제보에 의하면 옛날에 물을 길어 먹던 우물이 지금도 그대로 있고 중대 방석도 흔적이 그대로 있는데, 안은 위장병으로 10여년 전에 죽었고, 그의 아내가 아주 어렵게 살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저 멀리... 동쪽 마리아 성당 너머로 지평선에 까만 점들이 보였다. 우리를 여단으로 데려갈 헬기들이다. 점들이 점점 커졌다. 한참 후 다가온 건쉽 두 대가 중대 주위를 돌면서 경계를 하는 사이 헬기들이 차례로 내려 앉아 중대 병력을 태워 위로 올랐다. 나도 헬기에 올랐다. 헬기가 공중으로 솟았다. 6중대 방석 사진

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다시는 볼 수 없을 6중대방석이 저 아래로 멀어져 간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6중대방석을 뜨고 내렸건만 오늘만큼은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를까....
공중에 올라와서 보니 저 아래 중대 북쪽으로부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논밭을 가로질러 중대방석 쪽으로 뛰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일까? 저들은 누구일까?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어디선가 기관총 사격소리가 들렸다. 건쉽인지 아니면 경계병력에서 경고사격을 하는 것이리라....
마지막까지 중대 외각 경계를 하던 병력이 중대장의 무전 지시에 따라 전원 헬기장으로 집결하여 마지막 헬기에 올랐다. 마지막 헬기가 떠오르자 모든 헬기가 청룡여단으로 향했다.

나는 다시는 못 볼 월남의 산하를 열심히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6중대방석이, 그 북쪽으로는 5중대방석이 그리고 바로 아래로는 대대방석이 멀어져 간다.... 우리가 떠나면 이 지역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오래 가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살아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서운하고, 먹먹하고 또 눈물이 나올똥 말똥 하는건 또 무슨 주책인가? 이것도 이별인가? 좌우간 머리 속이 복잡하다.... 월남에 올 때 같이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막 뛰어 다니는 것 같이 혼란스러웠다....
드디어 여단에 내린 병력은 다낭항까지 차량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지휘관들은 긴장을 늦추지 말 것을 계속해서 주지시켰다. 여단에서 다낭항구까지 차량이동 중 적의 기습이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귀국선~! 어쨌든 귀국선 뱃속에 들어가야 진짜 사는 거라고들 하였다.

여단에서 차량으로 다낭항구까지 이동 도중 곳곳에서 아군의 경계병력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일 년 전에 월남에 도착해서 호이안에 있는 여단으로 이동했을 때도 저런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 대대 병력의 이동이라 차량행렬이 매우 길어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맨 뒤의 후미는 적의 사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리 철수 중이었지만 우리는 소규모의 적들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대대병력이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다낭항 부두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나 내가 작년 월남에 올 때와 같은 배에서 막 내린 피부가 하얀 월남 신병은 없었다.^^
우리는 드디어 배에 올랐다. 배의 옆구리에 있는 문을 들어서면서 나는 속으로 "살았다~!" 하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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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선--부산항....
귀국선 배가 다낭항을 출발하고 몇 시간 후부터 다시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이번 멀미는 작년 월남에 올 때 보다도 더 심했다. 일 년이 넘는 월남 생활에 심신이 많이 망가졌나보다....
그래도 우리는 좋았다. 마냥 행복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그랬으리라...
그런 와중에서도 태진이의 생각은 늘 머리 속 한편에 남아 있었다, 지금 태진이와 같이 가는 거라면....

며칠 후 갑자기 바깥 공기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살을 에이는 찬바람이었다. 아~! 지금이 12월,
한국에서는 지금 추운 겨울인 것을 잊고 있었다.
너무 추워 갑판에 나가 있을 수가 없었다.

1971년 12월 9일 드디어 배가 부산항에 들어섰다. 높은 갑판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부산항 제 3부두는 어마어마한 인파로 가득했고 그 한편에는 환영행사장으로 보이는 곳이 요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한국의 인기 연예인들은 다 동원되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주월한국군중 처음으로 철수해 오는 부대이니 당연했다. 앞으로 계속해서 철수해 오는 부대들은 이런 대대적인 환영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뒤늦게 월남에 갈 때 그러했듯이...
행사장에 참석할 병력이 내려가고 우리는 배에 남아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배의 바로 아래 부둣가에 수많은 가족들이 나와 각종 피켓에 이름을 써서 들고 다녔고또, 풍선에 이름을 써서 긴 실에 매어 갑판 높이까지 올려 보내기도 하였다. 나는 선실로 내려가 잠시 후 내릴 준비와 월남서부터 갖고 온 PRC-25 무전기를 챙기고 있는데 누군가 다급히 뛰어 들어와,

"야! 신완식, 네 이름이 씌여진 풍선이 올라왔어 !" 했다. 갑판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러나 이런~! 장내를 정리하는 헌병들이 사람들을 배에서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누굴까? 안타까웠다. 그때 어떤 동기 하나가 내 이름이 씌여진 풍선이 있어 내려다보았는데 부모님 같더라, 그래서 너 이 배 안에 있다고 악을 안고 손짓으로 알려 드렸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중에 들은 부모님 말씀이 그때 군인들이 밀어 내면서 모두 포항으로 갈 거니까 면회를 하려면 포항으로 가라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편찮으셔서 그냥 서울로 돌아오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풍선을 띄웠을 때 갑판위에서 누군가가 내가 배에 있다고 손짓으로 알려 주어서 일단 안심하셨다고 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집에 가서 뵐 텐데 불편하신 몸으로 여기까지 오시다니.. 가슴이 찡~ 했다..

행사가 모두 끝나고 모든 병력이 배에서 내려 부두에 집결했다. 지시 받은대로 무척이나 정들었던 무전기를 나를 찾아 온 보안요원에게 넘겨주었다. 그 무전기는 그 당시 미군이 사용하고 있는 최신형 무전기여서 특별 취급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6.25 때 쓰던 낡은 미제 무전기인 PRC-8, -9, -10 을 사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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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으로 -- 첫 휴가....

포항으로 가는 길은 작년에 월남으로 갈 때의 역순이었다. 기차로 포항역까지, 다시 트럭으로 포항 사단까지 가서 배치 받은 병사에 여장을 풀었다. 여기서 일주일간 대기 후 전원 보름간의 휴가를 가게 된다고 했다. 아~ 드디어 그동안 여러번 속아왔던 휴가를 이제야 정말 가게 되는구나, 설마 이번에도 거짓말은 아니겠지?? 우리는 갑자기 당하는 추운 기후에 적응하며 하는 일 없이 일주일이 가기만 기다렸다. 이틀이 지나자 입술이 트고 갈라지고 부어서 밥을 먹기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저마다 그리던 고향을 찾아갈 기대에 마음이 한 껏 부풀어 있었다. 그 일주일 대기하는 동안에도 월남에서 포악했던 3소대장은 각종 트집을 잡아 쫄병들 패기에 정신이 없었다.
휴가 출발 전날 부대배치발표가 있었다. "9365xxx, 상병 신완식, 교육기지~!" 내가 앞으로 제대할 때까지 근무할 곳은 진해였다.

해병들은 진해 신병훈련소를 수료하고 떠날 때 "다시는 이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라는 말을 농담 삼아 흔히 한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인가? 월남으로 가기전에 행사 부대에 뽑혀 훈련소로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이젠 또 아예 근무를 진해에서 하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딜 가든지 군대생활은 비슷할 테니까...

다음날 드디어 입대후 첫 휴가를 출발하였다. 서울 쪽으로 갈 몇 명, 그러니까 월남에서 귀국박스를 같이 사용한 동료들끼리 생전 처음으로 고속버스로 경부고속로를 달려 보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고속버스에는 예쁜 안내양이 있었고 신문도 나누어 주고 사탕도 주고, 안내 방송도 했었다. 또 지금의 비행기 여행처럼 스위치만 눌러 안내양이 오면 물 한컵을 시키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또 그레이하운드라는 회사의 고속버스는 차 안에 화장실도 있었다.

우리들은 서울역 뒤에 있는 서부역으로 가서 월남에서 부쳤던 귀국박스를 찾아 뚜껑을 열고 각자의 물건을 꺼내 갖은 후 다음날 동작동 국립묘지 태진이의 묘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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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동 국립묘지....

다음날 나는 태진이가 있을 동작동 국립묘지로 갔다. 안내소에서 위치와 묘비번호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월남 전사자 묘역으로 수없이 많은 월남 전사자의 묘비가 있었다. 드디어 해병상병 김태진의 묘 라고 새겨진 태진이의 묘비를 보는 순간 가슴이 찡~ 하고 아려 왔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분노도 치밀었다.
동작동 국립묘지 김태진의 묘
곧 이어 월남 전우들이 모였다. 우리는 다 함께 태진이의 명복을 빌었다. 그날 우리는 매년 현충일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그 약속은 제대 후 두 번 정도 지켜 지는 듯 하더니 그 후에는 지금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 혼자만 30년이 넘도록(2005년 현재) 매년 태진이의 가족이 다녀간 흔적을 보아 왔을 뿐이다. 태진이의 가족이 다녀간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매번 나라에서 기본으로 해주는 꽃이 아닌 아름다운 꽃이 듬뿍 꽃혀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꽃이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나? 형제들이 혹 외국으로 이민이라도 떠났나? 그러나 나로써는 알길이 없었다.. 나는 거의 50년이 된 지금까지 한번도 걸러 본 일이 없이 매년 현충일이면 태진이를 찾았다. 나에게는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하늘이 태진이에게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제대하기 전에도 그 때 특별 포상휴가를 받아서 태진이한테 갈 수 있었으니까.... 처음 몇 년간은 묘비 앞에 메모를 써 놓기도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ㅠ.ㅠ

그런데 2020년 초에 "코로나19" 라는 세계적인 악성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여 태진이한테 갈 수가 없었다. 올해(2121년 02월 현재)는 어떨 지 아직 모르겠다...

그러던 중 삼십 년이 지난 2000년 11월 26일, 정말 극적으로 월남 6중대 전우 230기 신현기를 재회했다. 그래서 지난 현충일에는 신현기 부부와 우리 부부 넷이서 태진이한테 갈 수 있었다. 우리는 오리지날 진로소주(두꺼비)를 푸짐히 따라주었다. 태진이가 매우 반가워 했을 것이다....

태진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03-3-3791(묘역-묘판-묘비)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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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해병통신교육대(2)....

진해 해병통신교육대 '72년 7월... 입대한지 19개월 반 만에 처음으로 얻은 꿈같은 보름 간의 휴가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진해로 내려갔다....
진해에서 최종적으로 내가 배치된 곳은 해병교육기지사령부 상륙전학교 해병통신교육대였다. 이곳은 신병훈련소 영내가 아니고 진해시 동쪽 외곽 장천에 위치한독립 부대로 내가 입대하던 해 8주 신병훈련 후 4주간 후반기교육인 유선통신 교육을 받은 곳이다. 이제는 피교육자가 아닌 실무병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통신교육대 바로 아래 오른편에는 해군 UDT교육대의 일부 건물이 있었고, 왼편에는 차량 운전 및 정비를 교육하는 해병수송교육대가 있었다. 내가 앞으로 제대할 때까지 근무해야 할 통신교육대에는 장교, 하사관, 병을 막론하고 나보다 고참은 전원 100% 월남을 다녀왔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내가 월남을 다녀왔다는 것이 그곳에서는 목에 힘 줄 일이 되지 못했다.. ㅠ.ㅠ

그 당시 교육대에서 지금 기억해 낼 수 있는 사람은, 해사 출신 통신교육대장 유창식 소령, 선임하사 이익관 상사, 교관 이명수 중사, 집이 진해였던 김진득 하사 정도이다.... 이 중에서 특히 이명수 중사는 집에 월남전 때 적의 총알이 관통한 구멍이 뚜렸한 위장복 윗도리를 벽에 걸어두고 있었다. 이 이명수 중사를 198x년에 우연히 TV뉴스에서 기자의 인터뷰에 응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화물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때 아~ 제대를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병대에 입대하여 신병훈련을 받고 그 다음과정인 병과에 따른 후반기 교육을 받고 떠났던, 다시는 이쪽을 보고 오줌도 누지 않겠다던 바로 그 진해에서 계속 오줌을 누며^^ 약 13개월에 걸친 근무를 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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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2 + 4 = 6개 ~@.@~....

1972년 5월 승공음어 경연대회를 연다는 공문이 접수되었다. 서울 해병대사령부 대회에 앞서 김포여단, 포항사단, 진해교육기지에서 각각 대회를 열어 1, 2등을 서울 사령부 대회에 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우리 통신교육대 에서는 그 당시 당연히 아주 민첩하고 똑똑한 내가 뽑혔다.(진짜 =^.^=) 시합 내용은 평문을 음어로 조립하고 음어문을 평문으로 해독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빨라도 틀린 부분은 감점이 되기 때문에 빠른 사람이 반드시 이기는 건 아니었다.
별 2개 ~@.@~ 진해에서는 싱겁게 내가 1등을 했다. 별 어려운 상대가 없었다. 이때 별 두 개짜리 상장과 함께 부상으로 라이터를 받았는데 내 생전 별을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개와 악수까지.... 교육기지사령관 얼굴이 뿌옇게 되어 잘 보이지 않고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내가 근무하던 해병통신교육대의 교육대장이 소령이었으니....

이제 진해 보안대에서의 합숙훈련과 서울 출전이 남았다. 그러나 교육대에서는 행정병의 자리를 그렇게 비워 둘 수 없다며 합숙을 불허했다. 할 수 없이 과업시간 이후에 나 혼자 음어조립/해독 연습을 해야 했다.
우리 시합 참가팀은 서울시합 전날 상경했다. 우리의 인솔책임자인 보안대 하사의 지시에 따라 각자 헤어져 다음날 아침 후암동 해병대사령부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덕분에 그날 집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 1972년 5월 23일 사령부에는 전국에서 암호와 음어별로 실력이 쟁쟁한 멤버들이 모여 들었다. 혹시 아는 얼굴을 기대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시합이 시작되었다. 음어자재는 아주 오래전에 쓰던 낯선 것이 교부되었다. 그러니 미리 암기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직 판단력, 순발력, 요령, 눈치 그리고 정확성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첫째 시간 음어해독 시합,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해독을 해 나갔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내 귀에 크게 들려왔다. 다른 사람이 먼저 손을 들까봐 온갖 신경이 곤두섰다. 가슴이 찌릿찌릿 했다.
드디어 숨 막히는 해독이 끝나자마자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제일 먼저였다. 그러나 불과 몇 초 차이로 여기저기서 손들이 올라갔다.다음번엔 음어조립 시합, 역시 이번에도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그러나 오답 감점 때문에 내가 장담만 할 수는 없었다. 초조하게 발표를 기다렸다.

드디어 발표, "1위, 교육기지 상병 신완식!" 와~! 내가 1등, 우승이었다. 이럴 수가~! 음어시합과 암호시합의 두수상자가 모두 발표 되고 얼마 후에 시상식, 내 생전 별 앞에 서기 두 번째, 이번에는 별이 네 개였다.역시 눈앞이 뿌옇고 다리가 정신없이 흔들리고..~@.@~ ㅎ ㅎ 와~! 별 4개 ~@@.@@~

상장과 상품을 수여한 후, 사령관이 물었다.
"귀관, 부대장이 누군가?"  "네, 해병통신교육대장, 소령 유창식 님입니다~!" 아주 기합들게 대답했다.

상품은 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다. 지금은 별거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제법 괜찮은 물건이었다. 진해로 내려와 교육기지사령관한테 자랑스런 수상신고를 했다. 매우 흡족해 하는 사령관의 얼굴이 그제서야 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사령관의 집무실을 생전 처음 볼 수 있었는데 매우 크고 아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또, 바닥에는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신고를 받은 사령관이 즉석에서 대회 참석자들에게 휴가를 보내 주라고 옆의 부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잘 하면 이 휴가가 현충일 때 걸릴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올 현충일에는 태진이 너를 만나러 가리라....

그런데 이 글을 올리면서 보니 진해에서 받은 상장의 날짜가 서울 사령부에서 받은 상장의 날짜보다 더 늦게 되어 있다. 또, 내 이름의 철자도 가운데 글자가 틀리다. 아마도 진해 행정병의 착오이리라...

270기 김상은 후배님의 제보에 의하면 당시 해병통신교육대장 유창식 소령은 그후 진급하여 1사단 통신대대장(74-75년)을 역임했고 그 다음에는 해군본부 해병 통신감을 지내다 예편했다고 했다.


상으로 받은 라디오는 그 당시 서울 서대문 영천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에게 선물로 드렸는데 무척 좋아하셨다, 라디오보다 더 큰 배터리를 고무줄로 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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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진 상복(^^), 그리고 전역....

기합 바짝 든 쫄병(1)~! 기합 바짝 든 쫄병(2)~! 통신교육대로 돌아온 나는 완전히 영웅이 되어 있었다. 교육대장이 얼마나 좋아 했는지 그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상급 부대인 상륙전학교에서 경연대회 우승자의 포상휴가 15일을 신청하라는 정식 공문이 왔다. 교육대에서는 행정병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며 일주일만 다녀오라고 했다. 그래도 좋았다. 야호~! 드디어 귀국 후 처음, 태진이가 떠난 후 처음 맞는 현충일에 태진이한테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너무 기뻤다.

월남에서 철수한 뒤 나는 진해에서 13개월 반가량 근무하면서 매년 실시하는 사격훈련에서는 높은 점수를 얻어 특등사수 메달과 함께 증서를 받았다. 또 모범해병으로 뽑혀 진해 제4비료공장의 견학과 통제부 안의 8인치 포를 장착한 해군 전함을 견학하는 행운도 얻었다.
겉보기에는 이렇게 상복도 많고 그럴 듯 했지만 내무생활은 다른 곳의 생활과 다를 바 없이 고로왔다. 그러나 해병대의 고로운 생활이야 해병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 여기에는 적지 않으려 한다. 그당시의 해병대 군기는 사진에서 보듯이 내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고참이 사진 한장 같이 찍자니까 바짝 얼어붙은 쫄병들의 모습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1972년 여름이 지나갈 무렵, 월남에서 내가 기타를 치면 옆에서 엉터리로 만든 드럼을 두둘기며 재미있게 지내던 219기 윤종태 수병이 너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기수로 보아 지금은 제대를 했을 것이었다. 더욱이 진해에서는 그렇게 멀지 않은 부산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때는 서울에 갈 때 부산을 거쳐서 갔었다.
어렵게 찾은 윤종태 수병과 약혼녀 - 부산 태종대 1972년
나는 윤 수병을 찾으리라 마음먹었다. 언젠가 휴가 때 부산에서 차를 내려 윤 수병을 찾아 나섰다. 아는 거라고는 월남에 있을 때 들었던 이름 석자와 집이 부산 연산동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연산동이 넓으면 얼마나 넓으랴, 월남에서 정글을 뒤지듯 하면 찾을 수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연산동까지는 쉽게 왔으나 막상 찾기 시작하려니 막막했다. 연산동은 지역이 넓어 여러개의 동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먼저 한 동사무소에 들러서 알아보았으나 이름 석 자 가지고는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한 골목씩 수소문 해 나가기로 했다. 다행이도 그 시절 부산은 요즘과 달리 아파트도 없고 이웃끼리 서로서로 알고 지내던 시절이어서 희망을 갖게 했다. 나는 입이 닳도록 같은 말을 되풀이 하며 동네 곳곳을 누볐다.

"사람을 찾습니다. 이름은 윤종태이고 해병대로 월남에 갔다 왔고 올 여름에 제대했습니다~!
제대말년~, 교육대 현관 앞

이렇게 헤매기를 몇 시간, 드디어 윤 수병을 아는 주민이 나타났다. 지성이면 감천... 얼마나 반가웠는지~! 이렇게 해서 월남서 헤어진 지 약 1년 반 만에 윤 수병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외박이나 휴가때면 윤 수병한테 들렀다. 덕분에 서울 촌놈이 부산의 가볼 만한 곳은 다 다녀볼 수 있었다. 해운대, 용두산 공원, 금강 사직공원 등등.... 윤 수병의 약혼녀와 함께 영도 태종대도 놀러 갔었다.

내가 제대 후 윤 수병이 서울 올라와 태진이한테도 같이 가고, 한때 윤 수병의 근무지였던 울산에도 내려가고 했었다. 몇 년간은 그래도 연락이 됐었는데 그시절이 워낙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어쩌다가 서로 이사를 하는 통에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그 후 지금까지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정말 보고 싶다....ㅠ.ㅠ

이렇게 진해에서 근무 하는 중에 월남에서 나머지 부대들이 계속해서 철수해 들어왔다. 이래서였을까? 때아닌 해병대의 조기 전역 바람이 불었다.예정 시기보다 앞당겨 전역 명령이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월남으로부터의 철수로 인하여 병력이 많아져서 앞당겨 제대를 시키는 것이리라.... 그런데 그 혜택이 나한테까지 돌아올 줄이야~! 나는 훈련소에서 226기 동기 1,115명 중에서 맨 앞에서부터 36번째의 군번을 받았었다. 그 덕택으로 1기 선임 225기가 제대할 때 그 끝에 묻어 같이 제대했다. 226기는 3개월에 걸쳐 제대를 했으니 나는 군번이 늦은 동기보다 2개월이나 먼저 제대를 한 것이다.ㅎㅎ
그때가 1973년 1월 31일, 입대한 지 32달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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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Home history The Ventures 해병대 군가 모음 더 잊어버리기 전에.. 월남전

v2.24   2021.07.24   Since 2000.09.10   신완식   E-mail: im1@im1.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