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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겨울....

서울 아현동의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 4학년 시절... 그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독재정치 시절이었는데 나도 선배의 독려로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 채(3선개헌 반대였나??) 멋모르고 데모에 나서 아현동 로타리에서 전경한테 붙들려 얻어터지고 옷은 갈기갈기 찢기고 결국 닭장차를 타고 마포경찰서로 끌려가 각서를 쓰고 풀려난 적이 있는 시국이 어지러운 그런 때였다.

학창시절, 아현동 경기공전 캠퍼스 -- 뒷줄은 이충도/김수태/나/심상우, 앞은 다른 과?? 취직하기도 힘든 시절.... 졸업 전에 군대를 갔다오는 게 어떨까? 하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오곤 했다. 나 역시 집안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터라 관심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같은 과 이충도와 뜻이 맞아 졸업 전에 군대에 갔다 오기로 합의, 같이 탐색에 나섰다. 일단 병무청에 가서 살펴보았더니........

육군과 해병대는 복무기간이 36개월인데, 해병대는 처음부터 검토대상이 아니었고 육군은 통신 자격증이나 운전면허가 있어야만 지원이 가능했고, 해군과 공군은 복무기간이 42개월이었다. 친구와 나는 고민이 되었다. 육군을 갔으면 좋겠는데 자격증이나 운전면허가 없고, 해군이나 공군은 복무기간이 길고.. 그렇다고 그 끔찍하기로 소문난 해병대를 갈 수는 없고.. 음.. 그래도 그냥 조건 없이 갈 수 있는 곳은 해병대뿐이었다.

충도와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결국 에라~! 남들은 해병대에 죽지 않고 잘만 갔다 오는데 우리라고 가서 죽으라는 법 있나, 까짓것 길어야 3년인데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갔다 오자~! 이렇게 생각이 변했다. 결정이 나자 모든 게 홀가분해졌다. 이제 실행만 남았다....


해병대에 지원....

우리 둘은 병무청으로 다시 달려가서 해병대에 지원을 했다. x월x일 동빙고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고 했다. 그날 동빙고국민학교에 갔더니 우리 또래들이 수백 명인지 수천 명인지 우글우글했다. 병무청 모병담당관이라는 사람이 경쟁률이 5대1 이라고 했다. 해병대 군복을 입은 군인이 지원자들을 모아 놓고는 앉아! 일어서! 앉아번호! 하며 정렬을 시킨 후 하는 말이 지원자가 너무 많아 여기서 일단 추린다고 했다. 우리들은 그 해병대가 시키는 대로 이리저리 앉아, 일어서를 하면서 시험을 치러야 했다. 시험은 20명씩 그 국민학교 운동장을 두 바퀴 돌려서 선착순으로 몇 명은 합격이고 나머지는 불합격이라며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참으로 해병대다운(?) 황당한 시험이었다. ~@.@~ 우리 둘은 모두 당당히 합격했다....

그 뒤 신체검사를 서울 어딘가에서 했고 그로부터 얼마 후 최종 합격자를 발표했는데 나는 합격을 했고 친구는 떨어졌다. 치질이라나?? 나중에 들었는데 그 친구 뒤늦게 다시 학교 다니느라 애로가 아주 많았다고 했다..ㅎㅎ 그 뒤 이리저리 작성하는 것이 많았는데 어떤 양식의 특기란에 "라디오 조립"이라고 기재했다. 토목과에 재학 중이었지만 그 당시 전자분야 공부와 라디오, 전축을 조립하는데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썼는데... 이것이 나를 통신병으로 만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고, 결국 이 취미가 훗날 학교를 졸업하고도 전공인 토목을 마다하고 전자분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전자분야에서 일을 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5월 말경에 혼자서 해병대의 신병훈련소가 있는 진해로 가게 되었다. 친구와 같이 가지 못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같은 과 친구 권병설이 용산역까지 마중 나와 주었고, 드디어 군용열차에 올랐다. 아~! 이제 정말 군대, 그것도 해병대에 입대하는구나~! 드디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열차에는 비슷한 또래들이 꽉 찼었는데, 미리 머리를 빡빡 깍은 맹렬파도 많이 있었다. 저마다 해병대에 입대하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운 듯한 행동들을 한 걸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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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해병대 신병훈련소....

다음날 새벽.. 드디어 열차가 진해 경화역에 도착했다. 바로 경화역 앞 큰길 건너에 입소자가 신병훈련소 안으로 들어가는 큰 철문이 있었다. 제3정문이라고 했던가?? 그 문 안으로 들어가 며칠간의 가입소 후 1970년 6월 4일 정식으로 입대신서를 하고 해병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진해 신병훈련소에서 8주간의 기본훈련을 받았다. 그때가 6월과 7월이라 무더위에 장마까지 겹쳐 무척 고생했다.
장마철에 억수같이 쏟아 붓는 비속에서 앉지도 못하고 서서 식사를 하는데 밥에 국을 부었으나 철모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후라이팬을 채우고도 흘러넘쳐서 국 없이 그냥 빗물에 밥 말아 먹는 꼴이 된 적도 있었다.
우리 226기는 4개 중대(6, 7, 8, 9중대)로 나뉘어 훈련을 받았는데 나는 8중대 26소대에 배치되었다. 7중대에는 육동진 이라는 고 육영수 여사의 조카가 226기로 훈련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직접 본적은 없다. 가끔 새까만 세단 승용차가 눈에 띄었는데 그것이 육동진을 데려가고 데려오는 것이라 했다.
우리 226기는 모두 1,115명이 입대했는데 나는 그 중에서 36번째의 군번을 받았다. 나중에 우리 226기는 석 달에 걸쳐 나뉘어 제대를 했는데 이렇게 빠른 군번 덕분에 제대 할 때는 225기의 끝에 매달려 제대하는 바람에 제일 늦은 우리 동기보다 2개월이나 먼저 제대 할 수 있었다^^. 역시 어디서나 줄을 잘 서는 게 매우 중요하다..ㅎㅎ
훈련소의 변소는 병사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병사에서 연병장을 가로질러 바닷가 쪽에 있어 크건 작건 볼일을 보려면 넓은 연병장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그런데 언젠가 어떤 망할 놈이 우리중대 병사 건물을 돌고 있는 배수로에 큰 응가를 해 놓은 것이 아침 일찍 조교에게 발각되었다.
즉시 우리 8중대에 비상이 걸렸다. 중대 전원을 병사 앞에 집합시킨 후 조교는 발견된 응가와 배수로 꾸정물의 혼합물을 캔틴컵에 담아 우리들에게 그 커다란 미제 스푼으로 약 반 스푼씩 떠 먹였다. 조교가 직접 보는 앞에서 삼켜야 했다. 똥물을 마신 우리들은 즉시 근처의 수도꼭지로 달려가 토하기도 하고 수도 없이 입을 헹구었지만 영~ 찝찝한 일이었다 ㅠ.ㅠ

8주간의 훈련 중에 동기 두 명이 사망하는 잊지 못할 사건 두 가지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하선망 훈련 중 하선망을 힘겹게 오르던 동기가 중간에서 힘에 부쳤는지 손을 놓쳤는지 무장한 채로 두어 길 높이에서 땅으로 떨어져 죽은 사고였고, 또 하나는 상남교육대에서 선착순 기합 중에 목표물을 돌지 않고 중간에서 숨어있다가 돌아오는 무리에 살짝 끼어 들어오는 것을 조교한테 들켜 그 자리에서 얻어맞던 중 몽둥이로 배를 맞았는데 고통을 호소하며 며칠을 괴로워하다가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그때 그 조교는 헌병대에 불려갔었는데 며칠 후에 멀쩡하게 돌아와 그 후 더욱 포악하게 굴었다.

2005.05.03 부산에 살고있는 동기 정근섭이 우리 동기의 총 인원이 1,112명(징집 165명, 지원 947명)이라고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나는 우리 동기가 모두 1,115명 입대한 걸로 줄곳 기억을 하고 있었는데, 훈련 중에 둘이 죽었으니 1,113명이 훈련소를 수료했어야 맞을텐데.. 하고 답글을 올렸더니 정근섭의 답글이 다시 올라왔다. 1,112명은 포항 사단본부 해병역사관에 올라있는 공식기록이라며 탈영하다 물에 빠져 죽은 한 명이 자기 소대에 있었다고.. 그럼 그렇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1,115명이 엉터리 숫자는 아니었구나.. 결론은 훈련소를 수료한 우리 226기 동기는 1,112명이다.
226기 신병훈련소 8중대 수료기념 고된 8주간의 훈련이 끝나기 얼마 전 수료식에 가족들을 초청하라는 편지를 각자 집으로 쓰라고 했지만 나는 쓰지 않았다. 잠깐 얼굴 보자고 부모님께 이 먼 데까지 오시게 할 수는 없었다. 8주 기본훈련 수료식 날, 면회 온 가족이 없는 우리들은 면회를 온 가족들과 점심식사를 하러 간 동기들 덕분에 입대 후 처음으로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었다.
언젠가 식사당번 때 커다란 소대 국통을 나르던 중 먹음직스런 꽁치를 집어 먹다가 조교한테 들켜 그 꽁치를 도로 토할 때까지 무지하게 맞은 일이 생각난다.

수료식 날 병과발표가 있었는데 나는 통신병과로 명령이 났다. 입대 때 기록한 신상명세서에 특기를 '라디오/전축조립'이라고 써 넣은 것이 그 이유인 것 같았다.
황당한 해병대다운 병과배치였다.

226기 8중대 신병훈련소 수료 기념사진은 충주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226기 동기 홍원선이 제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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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해병통신교육대(1)....

226기 유선통신반교육 수료기념 통신교육대는 신병훈련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천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나는 유선통신병과로 그곳에서 해병통신교육대 팻말 4주간 교환근무 및 전화가설 등의 유선통신교육을 받았다. 발에 카우를 차고 나무로 만든 전봇대를 기어오르는 훈련도 받았다.
수료 며칠 전 전원 집합시켜 키 순서로 정렬시키더니 큰 키순으로 얼마간을 따로 분리해 모아놓고는, 교육대 수료 후 국군의 날 행사부대로 배속될 거라 했다. 행사부대란 국군의 날에 서울의 여의도 기념식장에서 열병, 사열, 분열을 하고 시가행진도 한다고 했다. 나는 키가 크지 않은데도 간신히(?) 포함되었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4주 통신교육대 수료식을 마치자마자 곧 수송트럭이 와서 행사부대로 뽑혔던 병력을 싣고 갔다.

오른쪽 사진은 226기 유선통신반 수료 기념사진으로 33년 만에 만난 하남시에 사는 동기 변규호가 제공한 것이다.

사진을 클릭하면 큰 사진으로 볼 수 있다.

국군의 날 행사부대....

행사부대는 입대하여 8주간 신병훈련을 받았던 바로 그 훈련소안에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서 신병들로만 구성하여 2주간 연습을 하고 서울 여의도로 옮겨 실무부대에서 차출된 고참들과 합류하여 4주간 더 연습한 후 행사를 하게 된다고 했다. 행사가 끝나면 휴가를 보내줄 거라고 했다. 다음날부터 연습이 시작되었다. 완전무장에 그 무거운 M1소총에 대검을 꽂고 우로어깨총을 하고 12열16오(16열12오던가???) 로 오와 열, 대각선이 휘거나 흐트러짐 없이 행진하는 것이 연습의 목표였다. 연습은 오로지 베낭 메고 착검, 우로어깨총하고 하루종일 행진하는 것이 전부였다. 베낭을 메고 왼쪽팔을 앞뒤로 힘차게 휘둘러야 하니 곧 어깨쭉지가 아파왔다. 며칠 가지않아 왼쪽 어깨쭉지의 멜빵 닿는 자리가 벗겨지고 말았다. 자고나면 굳고, 또 벗겨지고 하는 것이 매일 반복되었다.
나는 원래 다리가 'O'형으로 휘어 양 무릎이 서로 닿질 않았다. 이 바람에 중대장한테 무수히 걷어 채이고 맞았는데 이게 무서워서 중대장이 가까이 오거나 나를 쳐다보면 있는 힘을 다 주어 양 무릎을 붙였다. 처음에는 잘 안 됐으나 나중에는 조금만 힘을 줘도 쉽게 붙일수가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2주 후 군용열차, 트럭편으로 여의도로 이동했다. 내고향 서울이었다. 마음이 설레었다.


여의도....

그 당시는 여의도 전체가 개발공사 중이었다. 온 천지가 모래벌판이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벌판에 우리가 지낼 소대천막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저 멀리 또 다른 대규모 천막들과 병력이 보였는데 그건 육군 행사부대라 했다. 우리는 실무부대 고참들과 반반 섞어 다시 편성되었고 우리 신병들은 그때부터 식사당번, 청소 등 쫄병이 해야 할 일을 도맡아야 했다. 다음날부터 땅도 아닌 모래벌판에서 연습을 해야 했다. 모래먼지가 휘날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땅보다 걷기는 더 힘들고... 그런 중에도 행사일은 다가오고 어깨죽지는 굳어 갔다. 행사일이 가까워 오니 516광장으로 가서 연습하는 때가 많아 졌는데 그곳은 잘 포장되어 있었다. 얼마나 좋은지.. 또 가끔은 구멍 뚫린 PS판이 깔린 공군 비행장의 활주로에 가서도 연습을 했다. 비행장 같긴 하고 공군부대 막사같은 것도 있는데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은 못 보았다. 죽으나 사나 자고나면 오와 열, 대각선 훈련에도 국군의 날은 점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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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날 기념식....

드디어 1970년 10월 1일 아침, 며칠 전 새로 지급받아 준비해둔 군복, 군화, 군장으로 곱게(?) 단장을 했다. 아침을 먹고 516광장의 지정장소로 갔다. 오와 열, 대각선을 맞춰서, 그것도 신이 나서... 그렇게 괴롭던 어깨죽지도 어느 틈엔가 완전히 굳은살이 박여 이제는 백리를 행진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보안부대 요원들이 나타나 미리 빼둔 M1소총의 공이를 가져가면서 또 총마다 하나하나 공이제거 검사를 하고 갔다.

드디어 '박정희 대통령각하 내외분이 서울대교를 지나고 계십니다.' 라는 사회자의 안내방송이 있었고 잠시 후 대통령내외가 입장하면서 국군의 날 기념식이 시작되었다. 열병, 사열, 분열~ 지난 6주간 미치도록 반복 훈련한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여의도 행사가 모두 끝나고 잠시 휴식에 이어 지급된 점심 도시락, 와~ 입대 후 이렇게 고급음식은 처음이었다. 입속에서 살살 녹았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가행진이었다. 시가행진은 아현동로터리에서 혜화동로터리까지라 했다. 아현동로터리는 입대 전까지도 내가 다니던 경기공전이 있는 곳, 괜히 기분이 들떴다.
서울 시가 행진 모습 아현동로터리 고가도로위에서 우리는 내렸다. 고가 바로 옆 아래에 학교 운동장이 내려다 보였다. 축구를 하는 아이들, 농구를 하는 아이들... 저것들이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와 있는 것을 알까???? 히힛... 기분이 묘했다. 고가위에서 대열을 가다듬으며 출발을 기다리던 중에 누구인지 참지 못하고 그냥 쉬~를 했다. 그 쉬~가 경사진 고가에서 죽~ 흘러가자, 그걸 본 해병들, 너도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히힛~! 전원 쉬이~! 고가 위가 좔좔좔~ 히히힛, 그렇게 쉬가 강물같이 아현고가 위를 흘러갔다. 그때 고가 옆 높은 빌딩에서 내려다보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고 난리였다. 히힛~!

드디어 군악대의 나자자 해병대 연주에 맞춰 중대장의 중대~, 앞으로 가! 하는 구령과 함께 시가행진이 시작되었다. 목적지는 혜화동로터리, 훈련 때는 그렇게도 힘들고 지겨운 행진이 그날은 왜 그렇게도 신이 나고 몸이 가벼운지.... 연도의 시민들이 깃발을 흔들며 꽃다발을 우리 행사부대의 목에 걸어 주었지만 나는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여우같은 고참들이 가장 오른쪽 열에 서야 꽃다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 신병들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행사 당일 아침에... 얄미운~ 선임수병~~~...

신문로, 광화문, 종로.... 종로5가에서 줄줄이 좌로... 드디어 혜화동로터리 우측의 어느 학교(동성중고등학교던가?) 교정으로 들어가 땀에 흠뻑 젖은 무장을 풀었다. 자원봉사 학생들이 따라 주는 시원한 음료수가 어찌나 시원한지~~ 휴식도 잠시, 우리는 수송트럭에 올라 여의도로 돌아왔다. 아! 이젠 휴가갈 일만 남았구나.. 하고 있을 때 신병 총원집합! 하는 구령소리가 들렸다. 휴가소리는 없고 부대배치를 발표한단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난 어디로 가게 될까?... 김포, 포항, 진해, 백령도??? ...

9365xxx 신완식! 상륙사단! 난 포항이었다. 휴가는 배치 받은 부대에서 보내 줄 거라고 했다. 부대배치 발표 후 즉시 철수작업이 이루어 졌다. 다른 곳으로 배치 받은 동기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눴다. 다시 트럭에 분승, 용산역? 아니면 영등포역? 에서 군용열차 편으로 포항으로 이동했다. 이튿날 새벽에 포항역에 도착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해병대의 상륙전기지 포항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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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상륙사단....

행사부대는 포항 역에서 수송트럭으로 사단으로 이동했다. 가는 도중에 지평선이 보일 정도의 드넓은 땅이 온통 파헤쳐져 있었는데 그곳이 포항제철이 들어설 곳이라 했다. 엄청난 황무지를 지나 사단에 도착했다. 우리 행사부대는 포항에서 다시 포항 행사부대로 다시 편성, 몇 일간 연습 후 포항 시내 시가행진을 한 후 해산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에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포항 시가행진을 멋지게 해치웠다. 행사 후 부대배치 발표가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 "9365xxx 신완식! 11연대 11대대~!" 11연대 11대대는 155mm 포병대대라고 했다. 발표 후 각 부대에서 나온 행정병들이 자기들이 데려갈 신병 들을 데려가고 있었다. 11연대 11대대에는 두 명이 배속되었다. 대대로 가는 도중 우리 둘을 데려가던 고참이 하는 말, "너희들은 벌써 월남으로 명령이 나서 오늘만 우리부대에서 자고 내일은 교육대로 가야 한다, 만나자 마자 이별이다.. 정말 안됐다.."는 것이었다. 순간 우리 둘은 멍~ 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실무생활 하루도 못해본 신병을 월남이라니?? .... 그날 밤 입대 후 처음으로 불침번 근무를 면했다. 이 불쌍한 신병들에 대한 고참들의 배려였다. 우리가 내일 갈 곳은 월남전특수교육대였다. 그곳에서 3주간 훈련을 받고 월남으로 가게 된다고 했다.

다음날 우리 둘은 부대에서 가르쳐준 대로 교육대를 찾아가 신고했다. 그런데 교육대에서는 우리들의 명령이 접수가 안됐다고 하면서 이리저리 전화로 확인하더니 부대로 다시 돌아가란다. 부대에서는 우리가 국군의 날 행사부대 차출로 행정서류가 늦어서 그런 거니 하루 더 묵고 가라고 했다. 그날 밤도 우리는 불침번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휴가는 어떻게 된 건지 뭔가 사기 당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최근(2002년 9월)에 부산에 사는 226기 동기 정근섭을 알게 되었는데, 그 동기가 오늘(2002.10.09) 전화로 이때 자대배치 받아 간 곳이 11대대가 아니고 11연대 3대대 11중대로 155mm 포대라고 알려 왔다. 이때 인수하러 온 행정병을 따라간 것은 네 명이었고 그중에 하나가 자기라고 했다. 더욱 뜻밖인 것은 정근섭도 통신교육대 수료 후(무선반) 국군의 날 여의도 행사와 포항에서의 행사에 참여했다는 것이 아닌가?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더욱 가까와 진 느낌이 들었다. 이 정근섭을 2005.04.24일 동기 이영화의 아들 결혼식장(서울 제기동)에서 재회를 할 수 있었다. 부산에서 올라온 것이다. 포항에서 헤어진 지 35년 만이었다. 정말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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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특수교육대....

다음날 드디어 월남전특수교육대에 입교했다. 그곳에는 신참들뿐만이 아니라 고참들, 하사관들도 섞여 있었다. 여기서 말로만 듣던 M16 소총을 처음 지급받았다. M1소총에 비하면 아주 가벼웠다. 교육은 월남 실전에 관한 진짜 교육이었다. 모두 월남을 다녀온 교관과 조교가 교육을 하고 있었다. 교육은 실전 같았다. 힘들게 땅굴도 파고, 수류탄을 몇 발 까 넣어 애써 만든 땅굴을 폭파시켜 버리기도 하고, 베트콩 복장을 한 조교들을 잡으러 산속을 정말 많이도 돌아다녔다.
교육대 수료 약 일 주일 전쯤, 월남으로 떠나기 전에 가족면회가 허락되니 각자 집으로 편지를 쓰라고 했으나 난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님도 연로하시고 집안 형편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때까지 내가 월남에 간다는 것을 알려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료 며칠 전 난데없는 면회가 왔다는 전갈이 왔다. 올 사람이 없는데?? 면회실에 나가보니 이런~! 이런~! 어머니가 와 계신 것이 아닌가? 부대에서 보낸 편지를 받으셨단다. "아들 아무개가 월남에 파병되니 떠나기 전에 면회를 오십사~" 하는 편지를 받으셨단다. 그 편지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혀 졌었다고 하셨다. 그때 나보다 세 살 위인 형도 육군에서 군 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셨으리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스레 손수 만들어 오셨다. 아버지는 몸이 불편하셔서 못 오셨단다. 수심이 가득한 어머니 모습을 보니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저 어머니 모습을 다시 뵐 수 있을까? 다들 잘 갔다 온다고 어머니에게는 별일 아닌 것처럼 말씀을 드리고는 있지만 내 가슴속 저 밑에서는 뭉클한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어머니한테 들킬 것 같아 서둘러 일어났다. 이제 들어가 봐야 하고 또 동료들과 같이 먹겠다고 둘러댔다.

연병장으로 나섰다. 차마 발걸음을 못 떼시는 어머니, 내가 쳐다보면 걷는 체 하시다가 내가 돌아서서 걸으면 그자리에서 내 뒷모습을 보고 계셨다. 내가 돌아보면 다시 가는 체 하시고.... 그러기를 몇 번... 드디어 교육대 정문 위병소에 다다른 어머니는 좀체로 가실 생각을 안 하셨다. 그러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솟구치는 설움과 함께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어머니가 눈치 채시기에는 다행이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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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이틀 후(1970.10.26) 우리는 부산으로 이동했다. 부산항 제3부두에는 우리를 월남까지 데려다 줄 거대한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송선주변에는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깃발을 흔들고, 악대의 쿵작쿵작 연주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배에 올랐다. 한국군을 월남으로 수송하는 배는 두 대인데 우리가 타고 갈 배는 이름이 SUPERIOR호이고 12,000톤급이라고 하는데 엄청나게 컸다. 병력수송을 위하여 미국 상선을 개조한 것이라 하는데 선실에는 2,000개의 침대가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육군 약 1,000명, 해병대 약 300명을 태우고 간다고 했다. 부산을 출발하여 해병대가 내릴 다낭항까지 5박6일, 해병대를 다낭항에 내려놓고 육군은 하루를 더 남쪽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선실 배정과 주의사항 하달이 끝나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조금 전에 우리가 머물던 부두가 저 아래 멀리 보인다. 그곳에는 환송 나온 가족들, 행사에 동원된 악대와 남녀 학생들... 바다 쪽으로는 저 멀리 돌섬 몇 개가 모여 있는데 그것이 오륙도라고 했다. 보는 방향에 따라 다섯 개로 보이기도 하고 여섯 개로 보이기도 해서 오륙도라나... 생전 처음 와 본 부산, 부산항이었다. 오후 5시쯤, 엄청난 뱃고동 소리와 함께 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가 한참을 후진하여 빙~ 돈 후 앞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하니 부두가 점점 멀어져 간다. 부산항이 저 멀리 보이고 아까 본 오륙도가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날이 빠른 속도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저 멀리 부산항에 전기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역시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어두워지는 바다... 여러가지 생각들이 복잡하게 머릿속을 돌아다니고 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슬픈 건지... 설레는건지.... 뭔가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모두들 말이 없다... 일 년 후 부산항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부모님 얼굴도 떠오른다....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에이~ 그냥 선실로 내려오고 말았다.

오륙도는 보는 방향에 따라 5, 6개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밀물 때는 여섯 개, 썰물 때는 다섯 개가 되기 때문에 오륙도라 한다는 것을 2004.02.11 이 글을 읽은 한 방문객이 지적해 주었다. 맨위로 가기

수송선....

배에서 육군은 식사당번을 맡고 해병대는 배 요소요소에 경계 보초근무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배에서의 첫 식사시간, 와~! 엄청난 규모의 깨끗한 시설을 갖춘 화려한 식당이었다. 기본식사 외에도 과일, 쥬스, 아이스크림, 쵸콜렛 등등.... 미국이 정말 부자나라라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선내생활의 주의사항 및 불침번의 순번을 확인했다. 어디에 가면 영화를 상영한다, 어디 가면 이런 것이 있고, 어디 가면 저런 것이 있다.... 황홀 또 황홀 그 자체였다. 불침번과 경계보초만 해내면 모든 게 황홀한 자유였다.


최신 좌변기.. 히힛~!...

좌변기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갔는데 칸막이도 없이 처음 보는 괴상한 모양의 변기가 여러 개 주욱~ 있었다. 그것이 털썩 주저앉는 좌변기라는 것을 처음엔 몰랐다. 그때까지 아는 거라곤 흰 고무신 모양의 수세식변기가 최신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변기 위의 까만색 플라스틱 위를 군화를 신은 채로 딛고 올라가서 쭈구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았다. 그러나 두 번째 갔을 때는 어? 누군가가 변기 위에 털썩 앉아서 편안히 볼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하~ 저렇게 하는 거구나~! 그 뒤로는 모두들 털썩했다..ㅎㅎ
그런데.... 머리가 띵~ 해 왔다. 아까부터 조금씩 느꼈지만 무심코 넘겼는데 점점 더 심해졌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뱃멀미인가 보다, 나는 뱃멀미를 하는 체질이구나... 걱정이 앞섰다.
배멀미.... 그때가 밤 10시쯤이었으니 부산항을 떠난 지 약 5시간 만이었다. 속이 울렁거려 갑판으로 올라갔다. 이런~! 갑판에는 이미 멀미에 약한 해병들이 누워서 버둥대고 여기저기서 토하고 난리였다. 그렇게 목이 터지라고 외쳐왔던 바다의 용사들이 이게 웬 꼴인가? ~@.@~ 누군가가 잠이 들면 멀미를 안 한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선실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고 속은 울렁울렁~~ 갖은 고생 끝에 겨우 잠이 들었는데.. 이젠 또 불침번 설 차례라고 깨운다. 이렇게 하여 월남행 수송선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이튿날, 멀미는 더 심해졌다. 그때부터 먹고 토하는 일을 반복하는 정말 괴로운 나날이었다. 갑판에서는 여기저기서 토해내는 것들이 세찬 바람에 휘날려 냄새와 함께 날아다녔다. 어지러웠다. ~@@.@@~ 갑판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수평선 뿐, 지나가는 다른 배도 볼 수가 없었다. 바다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는 멀미를 더욱 부채질하고.. 그런 와중에 며칠이 지나자 쌀쌀하고 추웠던 바깥공기가 갑자기 후끈한 더운 바람으로 바뀌었다. 남쪽으로 많이 내려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느날은 아주 큰 물고기가 배 옆에서 따라오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상어라고도 하고 돌고래라고도 했다.

드디어 월남도착 예정일인 10월31일 아침, 5박6일의 극심한 멀미 중에도 긴장이 되고, 마음이 설레었다. 갈매기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은 육지가 멀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심이 지나 드디어 수평선에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월남이다~! 육지는 점점 가까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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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도착....

귀국하는 해병 수송트럭. 다낭항....

드디어 배는 다낭항 부두에 대고 있었다. 다낭항은 우리나라로 치면 강릉과 같은 위치에 있는 항구다. 부산항과는 모습이 전혀 달랐다. 높은 건물은 없고 황량한 모래벌판에 엉성한 판자집 촌마을 같은 풍경... 말로만 듣고, 사진에서나 보던 야자수와 바나나 나무 같은 것들이 많이 보였다. 정말 낯선 풍경이었다. 우리는 배에서 내려 집결했다. 오랫동안 배에만 있다 내려서 그런지 모래바닥이 마치 바닷물같이 울렁울렁 움직였으나 곧 괜찮아졌다.

다낭항은 미군 관할이고 그곳에서 남쪽으로 수십Km 떨어진 호이안 이라는 곳에 청룡여단 본부가 있다고 했다. 여단에서 우리를 데려갈 차량이 오기를 기다렸다. 귀국하는 해병.. 얼마 후 저 멀리에서 일단의 차량행렬이 전조등을 켜고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나더니 곧 우리 앞에 와서 멎었다. 수송차량마다 나무상자들이 가득 실려있었다. 뒤이어 수송차량들에서 수백 명의 얼룩무늬 해병들이 쏟아져 내렸다. 바로 월남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는 해병들이었다. 우리가 타고 온 배로 귀국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모두들 아주 새까맣게 그슬려 있었고 눈들이 빤짝빤짝했다. 사람들 말이 전투를 치르면 눈에 살기가 돈다고 했는데 저것이 바로 그 살기인가?? 좌우간 나같이 신병 한테는 무척 무섭게 느껴졌다. 귀국하는 해병들은 모두 곤봉(더블백)을 하나씩 들고 즐거운 표정으로 배를 향해 가며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으나 그 기세에 기가 죽은 우리는 부럽고 겁먹은 모습으로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일 년 후 나도 저렇게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청룡 여단....

귀국부대가 배 쪽으로 떠난 후 우리는 귀국부대가 타고 온 수송트럭에 올라 여단으로 향했다. 여단으로 가는 도중 도로 옆 숲 곳곳에서 우리를 경호하고 있는 병력들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으나 우리들은 그저 겁먹은 신참들일 뿐이었다. 한참을 달려서야 청룡 여단기지에 도착했다. 넓은 벌판에 온통 모래밭이 아니면 숲이었는데  청룡부대 마크 여기저기 모래주머니(사낭)를 쌓아 구축한 벙커들과 초소, 진지, 철조망들이 보이고 하늘에는 여러대의 헬리콥터들이 엔진소리도 요란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쟁터라는 기분이 들기에 충분했다. 여기에서 일 주일간 실전 훈련을 받은 다음 부대로 배치된다고 했다.

그날 저녁 무렵부터 달라붙는 그 유명한 월남모기는 정말 굉장했다. 처음엔 하루살이들이 무더기로 날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월남모기였다. 온몸 여기저기가 따가와서 무심결에 손으로 여기저기 긁고 문대고 했는데 손바닥이 끈적거려서 보았더니 이런~! 손바닥에 시뻘겋게 피가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숫자도 숫자지만 군복을 뚫고 마구 쏘는데 정말 정신이 없었다. 모기약을 지급 받기까지 무수히 물렸다. 모기약은 스프레이와 처음보는 바르는 것도 지급 받았다.

다음 날부터 실전 훈련에 들어갔다. 한국에서는 물자를 아끼느라 조교의 시범만 보는 경우가 많았지만 여기서는 부자나라 미국이 군수물자를 무한정 대주기 때문에 아낄 것이 없었다. 또 실제 전쟁터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실제 실습으로 이루어 졌다. 수류탄, 클레모어, 지뢰, 조명지뢰, 60mm로켓, 핸드패러슛등 모두 실제로 장치하고 쏘아 보고 터뜨려 보았다.

월남에 오자마자 처음부터 나를 괴롭힌 것은 야간불침번이었다. 한국에서는 매일 밤 한 시간이 넘는 불침번은 없었는데 월남에서는 온 밤을 항상 3교대로 서는 것이었다. 해가 질 때부터 밤 12시까지, 그 다음은 3시까지, 또 그 다음은 밝을 때까지... 정말 졸음을 참기가 힘들었는데...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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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죽을 뻔....

월남에 온 지 사흘째 쯤, 불침번을 해질 무렵부터 밤12시까지 서는 날이었다. 그날도 참을 수 없는 졸음과 싸우며 옆 초소의 전달을 힘들게 외치고 있었다. "열하나 독점땡땡~! 정신통일~!....열하나 독점셋공~! 근무철저~!".... 밤 11시30분을 알리는 전달 고함소리는 전달한 것 같은데.... 그다음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고 화들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조금 전까지 분명히 내가 가지고 있었던 카빈소총이 없어진 것이었다???
사낭 위에는 실탄이 꽉 차있는 탄창만 덩그라니 고요한 별빛에 빛나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총은 순찰하던 당직하사가 내가 조는 것을 보고 가져간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정말 겨우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당직하사와 사고자(군 형무소에서 복역 중 자원하여 온 고참 사고병) 둘이서 날 패면서 하는 말, "군법에 전장에서 개인화기 분실은 사형이지만 죽이진 않을 테니 찍소리 말고 맞아라~!" 라고 하는 것이였다. 그날 맞다가 두 번 뻗었다.. 이것이 나에겐 엄청난 충격이 되어 그 뒤로 제대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근무 중 졸아 본 적이 없다. 이 근무 중 개인화기 분실이 여단기지내의 훈련장이 아니라 훈련 후 부대배치되어 실제 작전 중에 일어났다면 난 죽은 목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만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도 전쟁터에서 경계근무 중에 졸면 안된다는 시범케이스로 운이 나쁘게 내가 걸렸었는지도....

훈련 중 이리저리 들리는 말이 2대대 6중대가 제일 위험한 곳이라 전해졌다. 그 이유는 6중대가 청룡부대 중에서는 유일하게 산악지대가 시작하는 초입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드디어 훈련 마지막 날 부대배치가 발표 되었다. "9365xxx 신완식, 2대대~!" 나는 2대대였다. 그러면 그렇지... 돈, 빽없는 내가 무슨 수로.... 통신병으로는 나 말고 225기 박삼례 수병이 함께 2대대로 가게 되었다. 2대대까지는 헬리콥터로 가야 했다. 거리도 거리지만 소수의 병력으로는 위험해서 차량으로는 이동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속으로 6중대만 걸리지 말아라~ 하고 빌었다..



2대대로....

하늘에서 본 5중대방석사진 2대대로 배치되는 여러 명이 헬리콥터에 올랐다. 생전 처음 타 보는 헬리콥터는 엔진소리가 엄청나게 커서 옆 사람과 대화를 할 수가 없었고, 헬기 양쪽 문에는 영화에서나 봤던 기다란 실탄줄을 장진한 기관총이 거치되어 있고 미군 사수가 한 명씩 자리잡고 있었다. 신기하고 재미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진짜 전쟁터구나 하는 생각에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날 생전 처음으로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숲, 논밭, 모래 벌판 상공을 한참을 날아 2대대 상공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대대방석은 마치 거대한 피자 같은 모습이었다.

오른쪽 사진은 2대대 5중대방석, 평지에 위치한 방석은 모두 이렇게 커다란 피자같이 생겼다.

대대방석에 내려보니 여기도 온천지가 사낭더미였다. 벙커도 초소도 교통호도 모두 사낭으로 뒤덮혀 있었다. 대대 통신반에 가서 신고를 했다. 2대대에는 나보다도 먼저 와서 근무하고 있는 226기 동기가 있었다. 김태진이었다. 내가 국군의 날 행사를 치르는 사이 바로 월남으로 온 것이었다.

2대대 주변에는 5, 6, 7중대와 CAP소대가 있는데 그중 6중대 방향으로는 멀리 산악지대가 시작되는 듯 보였다. 멀리서 포성이 들려왔다. 아~! 여기가 진짜 전쟁터구나... 6중대로 나와 225기 박삼례 수병이 가게 되었다. 각오는 했지만 계속해서 악조건, 오지로만 떨어지는 것에 약간의 분노도 느꼈다, 그날로 또다시 헬기에 올라 6중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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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중대로....

하늘에서 본 6중대는 피자같이 생긴 다른 부대와는 달리 과연 소문대로 조그만 산위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뒤로는 점점 높은 산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6중대에 착륙하여 줄줄이 신고를 마쳤다. 드디어 월남에서의 진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죽으나 사나 여기가 앞으로 일 년 동안 내가 지내야 할 곳이었다. 여기도 역시 모든 시설물이 사낭으로 뒤덮여 있고 벙커들은 모두 반쯤 땅속에 묻혀 있었다.  6중대방석은 월남이 옛날 프랑스의 식민지였을 때에 프랑스군이 주둔하던 요새였다고 했다.
6중대방석 컬러사진 호이안, 6중대 일대의 군사지도
왼쪽 사진은 6중대 OP에서 중대본부와 1소대 쪽으로 본 모습이다.
왼쪽에 중대본부 상황실과 하얀 스트롱 지붕, 그 왼쪽이 중대장 벙커이고 그 왼쪽 높은 탑 같은 것이 해포관측OP.... 저 멀리 흰 기둥 두 개가 정문이고, 사진 오른쪽 하단에는 월남 RF의 105mm 곡사포 진지가 보인다.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105mm 진지 우측으로 쑥 들어가면 통신제1벙커가 있었다.


이 6중대방석 컬러사진은 지금은 외국에 살고 계시는 대선배 장교님께서(익명요구) 1968년도에 6중대에서 근무 중 찍었다는 귀중한 사진이다. 내가 있던 때와는 조금 다르지만 전체 골격은 그대로다.


지도는 호이안 및 6중대가 있던 곳의 당시 군시지도지도인데 부라보탱고(BT) 032, 510 지점에 6중대가 있었다.

두 사진을 각각 클릭하면 더 큰 사진으로 볼 수 있다.


최근(2002년 10월) 인터넷을 뒤져 내가 월남생활을 했던 지역의 제법 자세한 군사지도를 발견했고, 내 기억과 입대 전 토목을 전공했던 실력을 발휘하여 위와 같이 6중대방석의 위치를 지도상에 표시할 수 있었다.^^

6중대에서 북쪽으로는 고노이섬에 위치한 5중대가 강 건너 멀리 보인다. 대대가 있는 동쪽으로는 자큐마을 넘어 월남에서 둘째 간다는 마리아 성당(자큐성당이라고도 불렀음)이 가까이 보였다.
중대 전체는 동서로 길 게 뻗어 있는데 중앙의 고지 정상에 콘크리트와 벽돌로 견고하게 지어진 OP가 있고 서쪽 산악지역 쪽으로는 2소대가 길게 뻗어있었다. 2소대 최전방초소 아래에는 사이공에서 하노이로 가는 철로가 남북으로 비스듬히 뻗어 있고 그 철길 건너 바로 128고지를 시작으로 남서쪽으로 점점 더 험준한 산악지대가 뻗어 있었다. 고참들 말이 이 철길의 레일이 군데군데 끊겨 있는데 그것은 VC들이 땅굴이나 진지를 구축하는 데에 쓰려고 산으로 운반해간 것이라고 했다.
OP에서 북쪽 아래쪽에는 사격장, 3소대, 밥을 짓는 주계가 있었고, OP로부터 북동쪽으로 중대본부, 더 북동쪽으로는 헬기장, 정문 위병소를 포함한 1소대, 남동쪽에는 81mm 박격포반, 남쪽 에는 60mm 박격포반이 있었고 그 앞 절벽 아래에는 통신제1벙커가 있었다. OP 뒤 남서쪽에는 무서운 화력의 직사화기인 106mm 무반동총반이 있었다.


오른쪽 그림은 내가 있는 모든 기억을 동원해 그려 본 6중대방석 안의 배치도이다.^^

그림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볼 수 있다.

이 모든 시설은 사격장을 빼고는 모두 완벽하게 구축 된 교통호로 뺑~ 둘러 쌓여있었고 그 외곽에는 철조망이 네 겹으로 구축되어 있고 각종 지뢰, 미진탐지기 및 그 무서운 클레모어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당시 6중대방석의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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